
깨진 화장품 뚜껑 하나가, LG가 되었다
― 1947, 구인회와 럭키
1950년대 초, 부산.
장사꾼들이 화장품 통을 들고 와 따졌다. "이게 또 깨졌소."
잘 팔리던 화장품이었다. '럭키크림' — 동동구리무라 불리던, 국산 화장품 1호. 문제는 크림을 담은 통의 뚜껑이었다. 운반하다 부딪치면 쩍쩍 금이 가고, 그러면 그대로 반품이었다.
대부분의 사장이라면 뚜껑 공급처에 호통을 치고 끝냈을 일이다. 구인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상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깨지지 않는 뚜껑을, 우리가 직접 만들 수는 없나?"
그 사소한 질문 하나가, 훗날 LG가 된다.
그는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구인회는 1907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스물넷이던 1931년, 동생과 함께 작은 포목상을 열었다. 첫해엔 500원을 까먹었다. 화려한 출발이 아니었다.
해방 뒤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화장품을 만들었다. 1947년에 세운 회사 이름이 락희화학 — 영어로 '럭키(Lucky)'. 첫 제품이 그 럭키크림이었다.
그리고 뚜껑이 깨졌다.
남들에겐 짜증이었을 그 문제 앞에서, 그는 플라스틱이라는 낯선 물질에 손을 댔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그는 사출성형기를 들여와 한국에서 처음으로 플라스틱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안 깨지는 뚜껑을 만들려다, 한 나라에 없던 산업 하나를 연 것이다.
첫 작품은 뜻밖에도 플라스틱 빗이었다. 어찌나 매끈했던지 "일제 밀수품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았다. 빗이 팔리자 비눗갑이, 칫솔이, 식기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 뚜껑 하나에서 시작한 일이, 집 안의 플라스틱 살림을 통째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문 하나를 열면, 그 안에 다음 문이 있었다.
칫솔을 만들다 보니,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칫솔은 우리가 만드는데, 왜 치약은 미국 것을 쓰나.
그래서 치약을 만들었다. 1년을 매달려 1954년 럭키치약을 개발했고, 시장에 내놓은 지 몇 해 만에 국내를 휩쓸던 미국 콜게이트를 밀어냈다.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으로, 플라스틱에서 치약으로 — 문은 계속 다음 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는 가장 큰 문 앞에 섰다. 전자였다.
1958년, 구인회는 금성사를 세웠다. 한국 최초의 전자회사였다. 그리고 이듬해, 이 나라에 없던 물건을 만들어 냈다. 국산 라디오 1호, '금성 A-501'.
진공관과 스피커 같은 핵심 부품은 수입해야 했지만, 나머지는 기술자들이 손으로 깎고 감아 만들었다. 한 나라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라디오를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안 팔렸다.
가장 잘 만든 물건이, 가장 안 팔렸다.
시장엔 밀수로 들어온 일제·미제 라디오가 넘쳤다. 사람들은 굳이 처음 보는 국산 라디오를 살 이유가 없었다. 공들여 만든 첫 라디오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다.
회사가 휘청이던 1961년, 라디오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건이 터졌다. 5·16. 군사정변이었다.
권력을 잡은 정부는 밀수품 단속에 나섰다. 시장을 덮고 있던 밀수 라디오가 걷히기 시작했다. 이어 이듬해부터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새 정부가 자기 목소리를 전국 방방곡곡에 들려주려던 정책이었지만, 그 바람을 타고 죽어가던 국산 라디오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기술이 아니라 정치가, 첫 국산 라디오를 살린 셈이다. 운이라면 운이었다. 하지만 그 운은, 안 팔린다고 라디오를 접지 않고 끝까지 쥐고 있던 사람에게만 찾아온 운이었다.
라디오 다음엔 선풍기가, 냉장고가, 흑백텔레비전이 '국산 1호'로 줄을 이었다. 그렇게 럭키와 금성은 — 훗날 'LG'가 된다.
(그 시작에는 동업자도 있었다. 1947년 락희화학을 세울 때 사돈인 만석꾼 허만정이 거액을 대며 "내 셋째 아들을 맡아 달라"고만 했다. 계약서 한 장 없이 시작된 이 신뢰가 반세기 넘는 구·허 동업으로 이어졌고, 훗날 LG와 GS, 두 그룹의 뿌리가 됐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다시, 깨진 뚜껑으로 돌아가 보자.
LG라는 거대한 회사는 무슨 위대한 비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화장품 뚜껑이 자꾸 깨진다는, 장사꾼들의 짜증 섞인 항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구인회가 한 일은 단순했다. 눈앞의 진짜 문제 하나를, 끝까지 따라간 것뿐이다.
이건 좋은 기업을 알아보는 눈과 정확히 닿아 있다. 우리는 흔히 '한 방의 대박 아이템'을 찾는다. 하지만 오래 살아남아 거대해지는 회사는 대개 그렇지 않다. 뚜껑이 플라스틱을, 플라스틱이 치약을, 치약이 라디오를 불러왔듯 — 하나의 문제를 풀면 그 안에서 다음 문이 열리고, 그 연쇄가 복리처럼 쌓인 회사다.
그러니 어떤 기업을 볼 때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 회사는 지금 무슨 '한 방'을 자랑하는가, 아니면 풀어 온 문제들이 다음 문제로 이어지며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가. 전자는 자주 반짝하고 꺼지지만, 후자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LG의 화학 계열사는 전기차 배터리의 소재를 만든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70년 전 '안 깨지는 뚜껑'을 만들겠다고 플라스틱에 손댄 그 문에서 한 칸 한 칸 이어진 끝이다.
깨진 뚜껑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사람. 그 작은 고집 하나가, 여전히 다음 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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